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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5 14:12

꽃동네사람들

조회 수 2086 댓글 0
시인

생전에
시집 한 권 내는 것이 소원이던
중증장애우 임흥수씨는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땅에 묻혔습니다.
그의 차가한 넋두리
첫눈처럼 휘 뿌리던 눈발들
하늘 어디론가 흩어져 가고-

‘멍에
하느님 당신께서
나의 양 어깨에 지어주신 죄악의 멍에를 지고
묵묵히 나 홀로 걸어 왔기에
이젠 뼈마디, 마디에서 원망하는 소리
힘겨운 심장의 소리 들립니다.
이제 나를 당신 앞에 쉬게 하소서
나의 하느님이시여
나의 땀방울을 거두소서.’

유신이 고통스러워
위로받던
당신 영혼의 시입니다.


사랑 51

매 순간 세계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지는
기억상실증환자는
누굴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을까?
그는 시공간으로부터
서로 미뤄지고 있는 것이니...

매 순간 양자로
새롭게 짜여지는 우주는
이전의 에덴을 기억할 수 있을까?
지금은 이곳뿐인데...
예전의 사랑과 내일의 용서가
서로 미뤄지고 있는 것이니...


그늘

홀어머니와 외딸이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온갖 궂은 일을 해서
딸의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딸이 보람되게도 대학에 들어 간 해, 추운 겨울 날
일을 마치고 오다가 계단에서 미끄러 넘어져
뇌를 다쳐 그만 반신불수가 되고 만 어머니
기동도 못한 채 생각을 거듭하다 꽃동네로 왔습니다.
독한 마음으로 편지 한 통 남기고-
작은 전셋집을 빼서 꼭 학교를 마치라는 글을 남기고
독한 걸음으로 성지골로 온
홀어머니.

어린 나무 싹은 부모나무 그늘로부터
멀리 벗어나야 합니다.
나무그늘은 나무 싹에게 적인 것입니다.
그런 환경조건으로 숲의 범위는 확대되어 갑니다.

치골이 장대한
애덕의 치매 할머니는
버스를 잘못 타서 이 곳 꽃동네까지 왔다면서
담배를 즐기셨는지 남자만 보면 담배 달라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다시 버스만 고쳐 타면
함께 살던 딸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부산 다대포인지, 가는 버스 노선만 물으십니다.


사랑 52

위대해질 수는 있습니다.
거룩해질 수는 없습니다.
땅의 왕국에서는...

위대해질 수는 없습니다.
거룩해질 수는 있습니다.
가난한 마음의 사랑은... .


복숭아밭

꽃동네에는
큰 복숭아밭이 있습니다.
꽃동네식구들이 땀으로, 정성으로 가꾸는
꽃동네에는
많은 은인들이 있습니다.
고맙게도 은인들은 해마다 늘고
꽃동네에서
은인들에게 감가할 표시는
복숭아뿐이기에
올해
꽃동네 식구들은
그들처럼 병들고 상해 떨어진
복숭아로 만족합니다.
내년에는
은인들의 도움으로
더 큰 복숭아밭을 갖게 될테니까요.


사랑 53

감사함을
깨달을 때는
희생 앞에서입니다.
또, 감사함을
깨달을 때는
용서 뒤에서입니다.
무엇보다도, 감사함이
은총으로 느낄 때는
사랑 가운데서입니다.

언제나 감사함으로-
희생으로 앞으로 나아가며
어디서나 감사함으로
용서로 뒤따르는 사람은
사랑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왕모래 몇 개

나이가 일흔은 넘을셨을까
본동의 할아버지가
시제관 벽에 지팡이를 세우고는
흰 고무신을 벗어 텁니다.
나이가 몇이신지, 언제 어떻게 꽃동네로 오셨는지
모르신다는 할아버지
지금 그 분을 괴롭히는 것은
왕모래 몇 개.

사제관에서 구원의 집으로
아직 이른 코스모스 길
꽃 몇 송이 화사하게 빼어났다.
그렇게 가버리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인 장마가 잠시 뜸한 날
먹구름 사이로
하늘의 빛살 기둥이 찬연한데
구원의 집 앞 뜨락 의자에는 눈먼 노인 두 분이
앉았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사랑 54

어느 시인께서...
‘특별한 사람이 만나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의 사람들이 만나 특별한 사랑을 만든다.’
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그 같이
평범한 사람들의 만남을 특별히 만드는
아주 특별한 그 무엇입니다.
사랑이 그러할진대
가난하고 병들고, 힘없는 이들과
관계 맺는 사랑은 얼마나 특별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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