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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5 10:16

꽃동네사람들

조회 수 2176 댓글 0


법칙

무당거미는 알을 낳고는 죽습니다.
수많은 알을 힘겹게 낳고는 죽는 순간까지
줄을 뽑아 알들의 보호막을 만듭니다.
그리고는 죽습니다. 아무런 방비 없이 노출된 채로...
생태계 순환의 법칙입니다.

병들고 망가져 제 육신도 가누기 어려운
꽃동네 식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저녁으로 기도합니다.
그들을 저버린
자식과 형제와 부모들
무심한 세상을 위하여-
온갖 형상의 불구로
기도하는 모습들이 눈물겹습니다.
용서와 사랑의 법칙입니다.


사랑 11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항상
마지막까지
남습니다.

모든 것에
이길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언제
지는 것 같아 보입니다.




구원의 집 현관을 쓸고 닦고
내방객들 신발을 가지런히 챙기는
싹싹한 할아버지.
예전에는 빨갱이었습니다.
교도소와 감호소에서 몇 십 년을 홀로 지낼 때
독거 방 변소 앞에 놓여 있던 검정 고무신 한 켤레
사상과 투쟁, 대의명분을 생각하며
불같은 생을 누이며 있던 고무신 한 켤레
오랜 침묵보다 싹싹한 할아버지는
지금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형형색색의
시발들을 가지런히 챙기고 있습니다.

심신장애자의 집 현관에는 토끼가 있습니다.
평생 앉은뱅이 깡충깡충 뛰어 움직여
가슴에 버젓한 명찰에도 ‘토끼’입니다.
그가 하는 일은 현관에서 신발관리를 하는 일
조금이라도 반듯하게 해 논 신발이 행여
비뚤어지면 무섭게 화를 냅니다.
화를 내는 그에게, 그까짓 신발 정도 가지고
그런다고 말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 12

돌이켜보면
모든 것들이
그러했듯이...
사랑은
사랑만의 곳으로
나를 데려가리라.

많은 상처로부터
실낱같이
사랑에 눈뜬
내 영혼이
소망하던 바대로...
사랑은 데려가리라.

험한 세상
내 영혼
돛을 세우면
사랑의 바람이
나를 데려가리라.
그곳으로... .


그물코

말 못하고
듣지 못하고
눈도 안 보이는 본동의 할아버지
한여름에도 헌 스웨터를 푼 털실로
자전거 바퀴살로 갈아 만든 뜨개바늘로
종일 내내 뜨개질을 합니다.
별 소용도 되지 않을 뜨개질을 합니다.
엉킨 실타래를 만나면 답답한 것은 보는 우리일 뿐
한 올 한 올 서두르지 않고 풀어 갑니다.
이것저것 풀어서는 다시 짜고
이 도막 저 도막 주워 이어서 뜨개질을 합니다.
운명의 그물코를 장님이 짜고 있다든가.

선한 것. 아름다운 것. 사랑 같은 것은
어느 순간에도 근원인 하늘 어디론가 돌아가 쌓이고
악한 것. 추한 것. 미움 같은 것은
그 모습은 희미하지만 본동 할아버지
뜨개질 코에 걸릴 것입니다.


사랑 13

새벽녘 별 하나
그대 눈빛이기를
아직 길이 남아
머무는 눈길이기를...

저무는 저녁놀
내 붉은 눈시울이
네 곳을 지워가며
벅찬 그리움이니... .


젊은 오씨

사고뭉치이던 오씨는
값싼 감상과 덧없는 향락 속에 살았습니다.
철없는 애인이 약을 먹고 죽었을 때
해독제 없다는 제초제를 똑같이 먹었는데
죽지도 않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죽음의 고비이던 사흘째
젊은 오씨는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꽃동네의 젊은 봉사자로서-
까불던 버릇은 친절한 붙임성으로
덧없는 방황은 이해심 많은 봉사자로 만들 것입니다.
오씨의 철없는 여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사랑 14

우리는 서로가
묻는다.
사랑에 대해
사랑을 갖고 싶어서.

사랑은 우리에게
묻는다.
서로에 대해
아무 것도 말고
나눔에 대해서만... .


지하층 병동

구원의 집 지하층에는 병동이 있고
그 밑층에는 성당이 있습니다.

지하 병동에는
이제 기다리는 노인들뿐입니다.
먼 살붙이라도 아직 기다리고 있을까요
살붙이는 아니지만 낯설지 않은 봉사자들이
떠 넣는 미음을 꾸역꾸역 받아먹으며
휑한 눈은 무엇을 더듬고 계실까요.
한쪽 방에는 갓난애들같이 벗은 노인들이
당신의 변을 치우는 봉사자들을 무심히 보고 있는데
다리가 불편해 휠체어를 탄
봉사자도 있습니다.

언젠가는 그 봉사자도
자신이 했던 것처럼 수발을 받으며
아름다운 시간들을 회상할 것입니다.
지하 병동의 노인들처럼
잊고 지우고 비우며 기다릴 것입니다.
깨끗하고 의미 있는 그 한 시간을-

오늘도 지하 성당에는
향이 피어오르고, 한 분의 노인
당신의 불편하고 허드레옷을 벗으시고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사랑 15

나는 살아오면서
숱한 사람을
사랑했던 것 같지만...

아니다.

사랑은 나로 인하여
고작 몇 사람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북 할아버지

반벙어리인 이북 할아버지의
사연은 알 수는 없으나
해질녘부터 컴컴한 녘까지
평화의 집 앞 국도 곁에
시멘 블록 한 장 놓고는 앉아
언제나
남쪽을 바라보시는
넋 나간 이북 할아버지
힘든 밭일을 마치고는
밥술은 드는 둥
냉수 한 사발 들이 키고 나가 앉아
먼 남쪽만 바라고 있습니다.

반벙어리 할아버지
그토록 넋이 나가야만
본향을 찾는 것인지-
그까짓, 마음에 사무치는데
북쪽인들, 남쪽인들-
바라고만 있습니다.


사랑 16

작은 등불로 눈을 떠
주위를 살피기보다는
앞을 못 보나 해바라기로
당신 쪽을 향하게
그 따스한 사랑을
알알이 빼곡 간직하게끔
하소서.

세상의 함성에 거들지 않고
자신을 지켜 침묵하는
보이는 것들의 확인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믿음을
소중히 하게 하소서.

저들이 찾는 행복에 시샘 않고
나의 슬픔을 저 높은 곳까지
들어올리소서.

나만의 사랑의 대상이기보다
영원한 사랑을 그냥 소망하기를...
크고 환한 불빛이기보다
작지만 따뜻한 불꽃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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