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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13 15:36

생인 손가락...

조회 수 3721 댓글 0
10여년 전부터 내 오른손 검지 손가락은 곪아 있을때가 많다.
손톱 밑이 곪을때도 있고 손톱 옆이 곪을때도 있다. 가끔 무의식중에 어디 부딛치기라도 하면 눈물이 찔끔 날정도로 통증을 느끼곤 한다. 처음에는 그냥 염증으로 곪았나 하면서 연고를 바르곤 했는데... 자꾸 심해져 병원을 찾아가 물었더니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아 말초혈관까지 혈액공급이 안되서 그런다고 한다.
혈액순환을 위해 매일매일 맞아야 하는 주사도 맞아보았고, 매일매일 약도 먹는데...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검지 손가락은 곪아 있다. 몇년전부터는 제일 키큰 손가락도 곪기 일수다. 요즘처럼 겨울에는 더 증상이 심해져 외출을 할라치면 손난로와 장갑은 필수품이 되어버렸다.

곪고 낳고를 반복하다 보니 내 검지손가락 손톱은 짧아지고 뭉뚝해져서 손가락 모양이 어찌나 미워졌는지...
아픈것보다 모양 미워진게 더 속상할때가 많다.
더 심해지지나 말아야 할텐데...
손가락을 바라보고 있으면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있냐" 는 옛말이 떠오르며 엄마 생각이 많이 난다.
열손가락 깨물면 다 아프지만 그 중에 생인손을 앓는 손가락은 더 아프다.
깨물지 않아도 아프니까...
그래서 난 엄마에게 생인손가락 같은 딸이다.
딸셋 아들셋 그중 막내로 어릴때는 이쁘고 착한딸 엄마 속 썩이는 일이 없었는데...
다 커서 얼마나 엄마 속을 아프게 해드리고 있는지 내가 아프고 싶어 아픈건 아니지만 늘 죄송한 마음이 많다.
엄마는 언니나 오빠들은 찬밥을 줘도 아버지와 나만은 새로지은 밥을 주곤 하셨다.
이제 6남매 모두 시집 장가 보내놓고 고향으로 다시 내려가셔서 내가 자란 추억어린 고향집, 나보다 더 정이 들었을 고향집에서 두분이 알콩달콩 살고계신다.
한동안 서울에 계시면서 얼마나 바다며, 흙을 그리워하셨지 모른다. 이제 고향에서 이것저것 노는 땅 하나없이 알뜰하게 일구고 걸어서 5분거리인 바다에 가서 조개도 캐고, 소라도 잡고, 게도 잡아 반찬 만들어 드시며 사시는 모습이 참 좋다.
농사지어 나온 고구마며, 콩이며, 고추며, 참깨, 들깨... 시골에 내려갔다 올라올때면 차안이 그득하다.
자식들 내려가면 바리바리 챙겨보내는 맛에 사는 분들처럼 서울올라와 잘 도착했다고 전화드리면 "그러니 조개살 보낸다구 싸놨넌디 정신 좀 봐라 그러니... 그럼 또 언제온댜?" 물으신다.

종종 작은언니는 함께 모여 앉아 있을때면 엄마는 수미만 이뻐한다며 퉁퉁거리곤 한다.
그냥 웃자고 하는 소린가 보다 했는데 언니가 정말 서운할때 많았다고 11월에 시골 다녀온 후에 내게 이야기하는게 아닌가.
밭이 틀려 고구마도 맛있는 고구마와 맛없는 고구마가 수확된 적이 있었는데 수미는 맛있는 것만 주고 작은언니는 맛없는 고구마만 줬다고 김치도 수미는 다 담궈주고 언니는 배추로 가져가라 하고...
등등 아무것도 아니고 수미는 아파서 직접 담궈먹지 못하니까... 이해는 되는데 서운할때 있다고....
나는 언니에게 망설임 없이 "언니 수미가 엄마의 생인손이라 그래..." 그 말을 하고 나니... 마음이 아팠다.
자판을 두들기고 있는 지금도 검지와 장지에 통증이 있다. 두들기지 않더라도 욱신거림으로 생인손을 느낀다.
엄마도 나를 보던 보지 않던 늘 이렇게 욱신거림 같은 아픔을 느끼고 계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애려온다. 엄마에게 "이제 수미걱정은 마... 잘 살고 있잖어."
큰소리를 하곤한다.
그리고 그 말을 할때면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힘껏 외치게 된다.
"잘 살아야지!"
"엄마의 생인손 다 나을 수 있게 잘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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