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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념의 스크린

김미경 소나무상<최우수상>
47세 가정주부


약속이나 한 듯 오늘도 역시 푸르스름한 새벽녘에 깨어났다.
어제 밤 역시 여러 잡다한 생각 속에서 뒤척였기에 깊은 잠에 빠지지 못했다.
언제부터 인지 어지럽게 헷갈리는 꿈속 세상에서 서성이다 이른 새벽에 눈을 뜨는 일이 잦아졌다.
꿈속 역시 현실의 연장선을 긋듯 비슷한 일상이지만 맘에 걸리는 잡다한 일로 끙끙거리다 잠이 들면 꿈속의 난 황당할 만큼 힘든 일을 겪는다.
갑자기 온대간대 없이 사라진 휠체어 때문에 땅바닥에 주저앉아 당황하며 두리번거리며 찾거나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의 도움을 불편한 마음으로 받으며 힘들게 산행을 하는 모습 등이다.
대체로 꿈 내용은 기억을 잘 못하지만 그런 당혹스런 꿈은 원하지 않아도 기억창고에 잘 놓여있으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듯 새삼스레 툭툭 상기되어 불편하게 한다.
어릴 적 꿈속의 난 현실과 달리 건강하게 뛰어 노는 평범한 동네 꼬마일 때가 많았다. 동네 친구들과 고무줄을 하고 담벼락을 타고 올라가 놀다 떨어질 뻔도 하고 친한 친구와 정답게 손잡고 걸어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등 평소에 하고 싶던 것들을 꿈속에서 해보곤 했다.
그런 꿈을 꾸고 일어난 아침이면 간밤에 원 없이 뛰어 논 것 같아 기분이 날아갈 만큼 좋았다. ‘좋아하는 놀이를 더 신나게 할 걸’ 하는 아쉬움이 남을 만큼 짠한 행복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아마도 사춘기 이후부턴 꿈속의 내 모습 역시 요즘 꿈속 나처럼 현실과 별다르지 않았고 더 이상 유쾌한 모습이 아니다.
이젠 꿈속에서도 건강한 내 모습을 볼 수 없음을 섭섭해 하던 나이도 오래전 지났지만 어릴 적부터 굳어진 나약함과 소심함이 사회생활과 대인관계에서 또 다른 장애로 여겨질 만큼 꿈속까지 나를 괴롭힌다.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아이의 숨소리와 남편의 코 고는 소리가 내가 방금 전 휠체어를 잃어버린 그 당황스러움이 현실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며 안도의 한숨을 내 쉬게 하지만 잠을 다시 청할 수 없어 거실로 나온다.
새벽에 깨어나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잠을 이룰 수 없다.
뒤척거리다가 다른 식구들의 잠까지 깨우는 바람에 원망을 들은 적이 있어 차라리 거실에서 또 다른 시간을 갖는다.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즐기라는 말처럼 즐기지는 못 하지만 오지 않은 잠을 억지로 청하기보단 차라리 또렷이 깨어 있음이 더 편한 것 같다.
거실의 넓은 창 밖 짙은 어둠은 상념의 배경이다.
그 배경으로 흐릿한 윤곽의 거무스름한 나뭇잎들이 춤을 춘다.
바람이 부는지 소담스런 작은 잎사귀로 둘러 싸여진 나뭇가지들이 서로 부딪치며 엉키었다 풀어졌다 하는 모습이 여러 마리의 뱀들이 뒤섞인 모습으로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고 서로 입을 벌려 먼저 물려고 덤비는 것 같기도 하다.
아침이면 싱그럽게 반짝이는 초록의 나뭇가지가 징그러운 뱀들의 움직임으로 보인다. 우울한 소재로 가득 차서 한가지로 그려지는 상념의 스크린 역시 기분 나쁘다. 우울 모드에서 빠져 나오려 머리를 흔들어 버리곤 애써 다른 상념 속으로 빠져든다.
아까보단 조금 밝아진 청 빛 배경으로 이젠 희미하게 윤곽이 살아 보이는 소나무, 복숭아나무, 감나무들의 모습에서 어릴 때 자라던 외할머니집 앞마당이 보인다.
할머니집의 넓은 앞마당엔 탐스럽게 피어 있던 이름 모를 많은 꽃나무와 그 땐 뭔지 몰랐지만 여러 가지 채소들이 심어져 있었는데 엄마와 할머니가 채소를 따느라고 우거진 꽃나무 사이에서 잠깐씩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마다 불안해하며 마당 한 모퉁이에서 유모차를 타고 있으면서 “엄마” “할머니” 하고 불러대던 어린 내가 보인다.
그 땐 내가 왜 혼자 걸어서 엄마를 따라 가지 못하는지 이해를 못했다.
한참 걷는 재미에 빠져서 여기저기 정신없이 돌아다닐 네, 다섯 살 나이였지만 난 여전히 두 살 아래 동생도 졸업한 유모차나 보행기를 타고 있으면서 그저 눈으로만 엄마를 따라다녔다.
난 나를 잡고 있는 유모차 때문에 내가 꼼짝할 수 없는 것 같아 그 곳을 탈출하려 다리를 들어 올렸지만 생각대로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기에 번번이 실패를 하였다.
내 다리를 묶어 놓은 유모차를 원망하며 옆에서 느긋하게 낮잠을 즐기던 엄마가 처녀 때부터 키웠다는 애꿎은 누렁이한테 “바보야!”, “가!” 라고 소리를 지르며 화풀이를 하곤 했다.
얼마 후 집안일을 마치신 엄마나 할머니의 등에서 낮잠이 들 때까지 나를 묶어놓았던 유모차와 그렇게 혼자 놔둔 엄마에게 화풀이를 하듯 계속 울어 대곤 했다. 어린 내 동생은 소아마비로 걷지도 못하고 여러 잔병에 시달려 짜증만 부리는 아픈 누나에게 엄마의 등과 유모차를 일찍이 양보하고 아장아장 걸어 다니며 혼자 놀던 모습과 누나인 난 엄마 등에 업혀서 낮잠을 청하던 참 웃지 못 할 장면과 함께 어린 내가 경험한 잊혀지지 않은 악몽이 슬며시 고개를 쳐든다.
방문 앞 대들보엔 항상 아버지가 신던 큰 군화같이 생긴 신발이 있었다.
어린 눈엔 그것이 무서워 보였는지 꿈속에서 그 신발에 눈이 생기고 입이 생기더니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이었다.
난 겁에 질려 도망치려 했지만 유모차에 묶여 있어 꼼짝할 수 없어 울기만 했다. 유년시절의 황당한 악몽도 친구들과 신나게 놀던 아련한 행복의 꿈도 잊혀지지 않는 짠한 서글픔으로 기억됨이 가슴 아프다.
유년시절부터 내 몸을 맘대로 움직일 수 없었기에 쌓여지는 욕구불만과 좌절감,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현실로 인해 결여된 자신감과 타인에 대한 피해의식 이 모든 것들이 꿈속에서 나를 괴롭힌다.
난 주로 바닥에 주저앉은 상태에서 타인을 올려다보고 타인은 선 자세로 날 내려다본다.
그런 한심하고 초라한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지만 날 움직이게 해 줄 휠체어는 보이지 않는다.
유년 때 기억처럼 내 몸을 움직여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는 간절하지만 여전히 난 무엇엔가 묶여 있다.
이른 새벽 참담한 기분으로 꿈에서 깨어나 상념의 상자를 하나씩 열어보는 이 무의미한 습관이 한심하다.
고집스레 굳어진 고질적인 나의 성향은 아무리 스스로를 자책하고 다잡아도 부서지지 않는다.
이렇게 죽는 날까지 맘에 안 드는 또 다른 나와 싸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희뿌연 창밖으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신문배달원이 보인다.
새로운 아침과 변함없는 일상이 또 시작되고 오늘도 난 상처로 묶여 있는 내면의 나를 다독이고 때론 나무라며 보이지 않는 치료를 할 것이다.
점점 밝아오는 반갑지 않은 새아침의 얼굴을 언젠가는 여유 있는 웃음으로 맞이하고 싶다. 활기찬 아침과 상반되게 피곤과 두통이 밀려온다.
하지만 나를 위한 치료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내일 아침엔 단잠에서 깨어나 밝고 행복한 소재들로만 상념의 스크린을 채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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