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이미지
크리스마스 선물


우창수: 자잣나무상<장려상>



“쥐약 주세요.”
눈이 유난히 반짝거리는 여약사가 의아한 듯 고개를 들어 재형을 바라본다.
이른 아침부터 웬 쥐약이냐는 듯하다.
“신분증, 제시해 주세요. “
순간적으로, 재형은 주민등록증으로 할까, 운전 면허증으로 할까 망설이다가, 천천히 운전 면허증을 꺼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여약사에게 건네준다.
새끼 밴 암쥐의 눈같이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재형은 뒤돌아서서 헛기침을 해본다. “애들 조심하세요. “
그녀가 쥐약과 거스름돈을 건네주며 말한다.
“그러지요. “
쥐약을 주머니에 넣으며, 그는 도망치듯 약국 문을 나섰다.

지선은 눈을 떴다.
적막하다.
몸을 움직여 본다.
그러나 마치, 몸이 없는 듯,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아, 꿈이 아니구나! 한다. 잘 때마다 생각한다.
이것은 악몽이라고, 내일 아침이 되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올 거라고…….
그러기를 벌써 1년이 다 되어 간다.
어젯밤에는 유난히 재형이 술을 마신 것 같았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면서, 기어 들어와서, 그대로 쓰러져 잤다.
재형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지선은 어젯밤 같이 달게 잔 적이 별로 없었다. 늘 술에 취해 들어온 재형은 아무 저항도 못하는 지선에게 폭언을 하고 구타를 하고는 지선을 껴안고 통곡하다가, 마치 울다 지친 아이처럼 잠이 들곤 했다.
맞을 때, 아무런 아픔은 못 느끼지만, 마음까지 마비가 된 것은 아니었다.
불쌍한 사람. 지선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맑은 하늘에 갑자기 무지개가 아롱진다.

그들은 고아였다.
아무데도 기댈 곳이 없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은 서로 사랑했다. 서로에게 따스한 보금자리가 되고 싶었다. 재형은 중소 기업체의 영업 사원으로 성실했으며, 지선은 한사람의 아내로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비록 잘 살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행복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었다. 지선은 빨래를 널기 위해 연립 4층의 베란다로 올라갔다. 그날도 눈부시게 푸르른 날이었다. 바람이 구름을 쫓아내듯, 세차게 불고 있었다. 빨래 하나가 하늘하늘 날아갔고, 지선은 나비를 쫓아가는 아이처럼 베란다 난간에 걸렸다. 순간 지선의 몸은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는 암흑이었다.

재형은 차를 몰고 있다.
앞 뒤 꽉 막힌 도로가 그자신의 인생길이라도 되듯이, 그는 우울해 있다.
“제수씬 좀 어때? “
“사모님은 좀 어떠세요? “
그의 친구나 회사동료들이 이따금 지선의 안부를 묻기도 하지만 그것은 스쳐가는 바람일 뿐, 결코 그들의 일이 될 수는 없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본다. 의외로 싸늘한 감촉에 그는 몸서리를 친다. 이렇게 작은 병인데…….
사랑해서 그러는 거야. 사랑해서…….
그렇다. 그녀가 고통 받는 것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어젯밤에도 그는 목 놓아 울었으리라 생각해본다. 울다가, 울다가 그렇게 잠들었으리라…….
아침에 지선의 자는 얼굴을 보았다. 천사 같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배시시 일어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신의 식사를 해줄 것 같았다. 항상 그래 왔었다.
그런데, 빌어먹을…….
재형은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저어 본다. 차가 서서히 빠지고 있었다.

“하나님을 믿어 봐.”
항상 와서 지선의 말동무가 되어 주는 주인아줌마의 말이다.
이곳으로 이사 오고 나서 늘 친정 엄마처럼 대해 주는 고마운 아줌마다.
“그럴게요.” 말로는 그렇게 하면서, 지선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하나님?
운명을 주관하는 절대자를 기독교에서는 그렇게 부른다.
다른 종교에서는 부처, 혹은 알라라고 부르겠지? 이름 따위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저, 그가 옆에 있다면, 한바탕 따져보고 싶다는 생각뿐 이었다.
도대체 내가 뭔 죄를 졌다고, 이런 설상가상의 가혹한 현실을 안겨주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이제 겨우 행복할 만하니까…….
“기다려. 내, 곧 아침차려 올 테니…….”
재형은 아침을 먹고 출근했는지, 궁금했다.
아침에 그가 일어나는 걸 안다. 하지만, 그녀는 자는 척 한다. 그는 맨 정신으로 그녀와 말하는 걸 무척 괴로워하는 듯 했다.
북엇국이라도 끓여줘야 할 텐데……. 사실 천애고아인 그녀와 그를 도와줄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이제 밥하는 건 완전히 그의 몫이 되었다.
“아이쿠, 맛깔스럽기도 하지.”
언제나 하는 소리지만, 아줌마의 말이 오늘따라 크게 들려 왔다.
그는 여자가 혀를 내두를 만큼 살뜰했다. 김치도 손수 담글 정도니까…….
지선의 몸이 일으켜지자, 소반 위에 밥과 반찬이 보였다. 특히, 김치는 새로 담근 듯 했다.
지선은 김치를 보자마자 속에서 욱하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거래처를 나서면서, 재형은 거리를 둘러본다.
무채색의 옷을 주로 입은 행인들이 증기기관차처럼 허연 김을 흘리며, 지나간다. 길 건너 백화점의 산타의 그림이 빨간 손을 흔들며 징그럽게 미소 짓는다.
내가 람보라면, 저 얼굴에 기관총을 한 움큼 갈겨 줄 텐데…….
재형은 신경질적으로 차에 탄 후, 시동을 걸었다. 히터가 들어와 훈기가 돌았다.
재형은 시트에 기대어 눈을 감아 본다. 그래……. 크리스마스지……. 재형은 잊고 있던 약속이 떠올랐다. 결혼 전에 지선과 한 약속이었다.
‘우리 O. 헨리의 소설 주인공처럼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팔아 크리스마스 선물하기로 해요.’ 그러던 게 벌써 3년이 지났다.
가장 소중한 걸 팔지 않아도 선물쯤은 사줄 수 있었을 텐데…….생활에 쫓겼다는 것은 핑계뿐이었고, 그 동안 무심 했던 것 같다.
재형은 눈을 떴다.
유리창 너머로 산타의 미소가 화사했다.

라디오에서는 캐럴송이 랩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맙소사. 캐럴까지 랩이라니…….
지선은 상을 찌푸렸다. 요란하고 시끄러운 랩 캐럴 때문에 도저히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서 태지는 왜 랩을 히트시켜서 캐럴까지 경박하게 타락시켰을까?
“신나죠? 저도 음악 나가는 동안 몸을 가볍게 흔들었거든요.......”
소위 톡톡 튄다는 유부녀 DJ, H의 멘트가 들려온다.
지선은 다시 생각에 빠져든다. 석 달 전부터 재형이 생리대를 채워 주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몸이 마비되면서 여자의 기능도 사라졌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재형은 늘 술에 취하지 않으면, 돌아와서 그녀의 몸을 사랑해 주었다. 아픔도 느끼지 못하니, 쾌감 또한 그랬다. 재형은 늘 절망적으로 절정에 오르곤 했다.
그럴 때면, 지선은 재형의 얼굴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쾌감도 아니고, 슬픔도 아닌 그 표정이란…….
그러나 그것도 3개월 전이 끝이었다. 그 후로 재형은 항상 술에 절어서 들어왔다.
때때로 몸에서 여자 화장품 냄새도 나기도 했지만 그녀는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래, 그이도 이젠 지쳤을 거야……. 눈물은 이미 마른지 오래였다.
하지만 이젠 어쩌지?
썩은 나무 등걸 같은 자신의 몸속에 새로운 생명이 숨 쉬고 있었다.
이것도 여자의 몸이라고…….

재형은 백화점 안을 거닐고 있었다. 연말이라 사람들이 콩나물시루 같아서, 걸을라치면, 자꾸 어깨에 어깨를 부딪쳐야 했다. 재형은 그런 느낌이 좋았다.
사람들이 많으면, 난잡한 느낌보다는 활발하고, 신선하게 살아 있는 느낌이 들었다. 지선도 그런 면이 있어서 그들의 데이트 코스로는 주로 시장의 순대가게 같은 곳이 애용되었다.
조용한 카페는 왠지 닭살이 돋는다나…….
재형은 갑자기 옆구리가 허전해 옴을 느꼈다.
산타 복장을 한 직원이 따스한 너털웃음을 날리며, 아이들과 연인들에게 풍선을 나눠주고 있었다. 그 너털웃음은 가볍게 재형에게도 날아왔지만, 재형은 따스함 따위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지선이 이곳에 있었으면, 무척 좋아했으리라. 순간적으로 그는 이방인이 되어버렸다.
소리치고 싶을 정도로 목이 말라왔다. 마른 침을 꿀꺽 삼켜본다.
“손님, 뭘 도와드릴까요?”
직원아가씨가 상냥하게 말을 걸어온다.
“아, 네…….”
재형은 그제야 정신이 들어 매장을 들러본다. 구두가 눈부시게 쌓여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구둣가게 안까지 침범해 들어왔던 것이다.
“선물하실 건가요?”
선물이라…….
재형은 픽 웃으며, 움츠러들 듯,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잠시 잊고 있던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아내는 이제 구두를 신을 일이 없을 것이다. 비단 오늘이 마지막이 아니더라도, 구두는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저기 빨간 하이힐이 좋겠군요.”
여직원이 상큼하게 웃으며, 물건을 몇 개 꺼내 왔다.
“사이즈는 몇인지 아세요?”
사이즈? 물론이다. 재형은 지선의 모든 수치를 기억하고 있었다. 속옷은 물론, 생리대의 기호까지 다 알고 있다. 근데, 재형은 씨름 선수 이만기가 나온 속옷광고 카피처럼 편안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되겠네요.”
재형은 사이즈를 모르는 척 해본다.
“포장해 드릴게요. 잠시 만요”
“안 맞으면 바꾸러 와도 되죠?”
“네, 물론이죠.”
재형은 시선을 돌려, 앞에 있는 다른 빨간 하이힐을 보았다. 처녀 시절의 지선은 빨간 하이힐을 즐겨 신곤 했다. 재형은 그 빨간 하이힐과 그 위의 각선미에 반해, 지선을 사랑하게 된 것이었다.아, 그때 그 하이힐의 또각거리는 소리란……. 그에 맞춰 나의 심장도 뛰곤 했지.
지금도 아내의 각선미는 여전히 눈부시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누워있다는 점이다.
재형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 구두를 선물한다면 지선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마지막이라는 걸 그녀도 알까?

지선은 모든 정신을 오른손 검지손가락에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래, 살아야 한다.
뱃속의 생명을 위해서라도, 그때까지라도 살아야 한다. 이마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손가락 하나가 이렇게도 무거웠던가? 결혼 전에 피아노를 연주하듯, 키보드 위를 춤추던 손가락 이였는데…….지선은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본다.
맑던 하늘이 서서히 희끄므리 해지고 있었다. 뭐가 오려나?
지선은 비가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몸져눕기 전에는 눈을 더 좋아했었는데……. 하지만 지금은 비가 더 좋다. 비가 오면, 우울해지기도 하지만, 마음이 차분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재형에게 이 사실을 말한다면, 그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기뻐할까?
나뭇등걸 같은 아내한테서 자식을 얻었다고? 짐을 하나 더 지워졌다고?
지선은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젓는다. 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오직 존재, 자기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작고 미약한, 그러나 살기 위해 생명력을 소유한 존재뿐이다.
지선은 다시 정신을 손가락에 집중해 본다. 아기가 태어나면, 적어도 안을 수는 있어야 한다.
지선은 이를 악물었다. 손가락 근육에 미세한 경련이 이는 것 같았다.

하늘은 황금빛으로 노을 지고 있었다.
재형은 소주를 쓰게 삼키고 있다. 시장은 언제나 시끌시끌하고, 앞에는 먹음직한 순대가 김을 무럭무럭 내고 있었다. 오늘따라 순대에서 올라오는 김이 칼 모양 같이 보인다.
그 칼은 탁탁 소리를 내며, 제 본체를 하나하나 잘라내고 있었다.
순대를 씹으며, 재형은 사람 마음이 이렇게도 간사했던가 생각해본다.
지선이 수술실에 실려 가고, 재형은 복도의 차가운 의자에 앉아,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살아만 있어달라고…….전신마비라도 좋으니, 살아만 있어달라고…….
지선이 회복실에 들어가도, 재형은 늘 지선을 위로했다.
살아서 곁에만 있어줘도 행복하다고…….그랬었는데…….
그녀에게 그동안 못할 짓을 많이 한 것 같다.
마음은 그게 아닌데…….
술을 다시 한 번 들이켜 본다. 알싸한 술맛이 목을 타고 내려와 빈속을 때린다.
쥐약 맛도 이런 맛일까? 순간적으로 재형은 픽 웃어본다. 지선이 결혼 전에 소주를 마시고는 상을 찌푸리며, 한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 쥐약 같은 걸 왜 먹어요?”
그러나 오늘 밤에 그녀와 그가 함께 먹어야 할 것은 쥐약 같은 게 아니라 진짜 쥐약이다.
소주병에 소주가 반병이 남았으나, 재형은 그냥 일어선다. 오늘은 취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고 싶었다. 문득 재형은 시가 읊조리고 싶어졌다. 지선이 처녀시절 곧잘 읊조려서 좋아하게 된 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기풍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와 있는 김춘수님의 꽃이라는 시다. 정확히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은 맞을 거라고 지선은 생각해본다. 이 시를 처녀 시절까지만 해도 무척 좋아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이일, 저 일에 쫓겨 다니고, 더구나, 몸이 이렇게 되면서, 시는 아득해졌다. 그런데, 이 아득하게 멀어져 있던 시가 문득 다시 돌아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선은 다시 생각을 해본다.
사실, 지선이 사는 것은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죽지 못해서였다.
손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약이라도 먹고 죽고 싶었다. 때로는 재형에게 자기를 죽여 달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재형에게 못할 짓하는 것 같아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말을 삼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랬었는데, 지금 지선은 그랬던 자신이 부끄러울 정도로 강력한 의욕이 흐르고 있었다.
인식한다는 것, 곧 안다고 하는 것, 깨닫는 것, 그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존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이다. 존재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나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을 뿐…….
인식이 있어야 비로소 존재는 의미를 얻고 꽃으로 피어나는 것이다.
지금 지선에게는 하나의 가냘픈 존재가 새로운 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잘 피어나도록 해야 해. 열심히 가꾸어야 해.
지선은 다시 정신을 집중해본다. 손가락이 굽혀졌다. 지선은 환호성을 울렸다.

재형은 집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을 걷고 있었다. 옆구리에 구두상자를 끼고, 손에는 순대가 든 비닐봉지를 덜렁거리며, 걷는 자신의 모습은 영락없는 신혼의 남편 그것이리라.
차가운 바람이 불어 내려와, 재형의 얼굴에 화가인 양 붉은 물감 칠을 해놓고 지나간다.
그것도 높고 좁은 곳에 사는 바람이라고 매운맛이 더 독했다.
저만치 집이 보이기 시작한다. 지하 단칸셋방에 지선이 혼자 누워있는 곳, 우리 집이라는 곳이다.
지선에게 말해야 할까? 널 죽이기 위해 쥐약을 사왔다고? 같이 먹고 깨끗하게 죽자고?
아니면, 몰래 음식에 타 넣을까?
그건 안 좋은 방법이라고 재형은 고개를 저어본다. 그래, 그녀는 자신을 이해해줄 것이다.
천사와 같은 마음을 가졌으니까 말이다. 재형은 순간 입맛이 썼다. 대문 앞에 서서 망설인다.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녀는 과연 죽고 싶어 할까?

그가 왔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지선은 느낌으로 알 수가 있었다.
방 안에 누워있으니, 직감이란 것이 무지 발달되어 버렸다.
이것도 살기 위한 적응일까?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하루하루 발달하는 동물적인 직감을 본능적으로 느낄 때마다. 그녀는 소름이 끼쳤다.
의식이 죽기 위해 동분서주 할 적에도 무의식 저편의 어두운 동굴 속에서는 살기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무섭게 만들었다.
한 가지가 퇴화되면 다른 것이 발달하여 그것을 대체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고, 지선의 몸 역시 그 법칙에 따라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인디아나 존스에 나오는 고대 신전의 기관같이 일정한 프로그램에 의해 작동되는 것이다.
하긴…….
운동기능이 완전히 없어져서 시력, 청력이 필요가 없어진 그녀에겐 직감의 발달이야 말로 환경에 가장 적절하게 적응한 것이리라. 그는 아마 대문에 기대어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것이다.
하늘을 보며,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도 하겠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정답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리라.
지선은 순간적으로 우울해졌다. 마음은 재형에게 달려 나가서 남이 보던 말든 소리 내어 웃으며 안기고 싶었다.
그러면서 재형에게 임신한 사실을 알리면, 그는 기뻐서 자신을 번쩍 들어 올려서 빙글빙글 돌려주겠지.
지선은 눈을 떴다. 그가 들어왔다.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지선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또렷하게 들린다.
재형은 그녀가 장난을 치고 있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더 늦기 전에 얼른 일어나 안겨왔으면 좋겠지만, 그녀는 여전히 누워있다.
“토요일이잖아.”
외투를 벗다가 주머니 속의 작은 병에 생각이 미친다. 밖에 놓고 오는 건데 깜빡 잊었다.
할 수 없이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놓는다.
“여보, 곧 크리스마스에요.”
“응? 응. 그렇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흠칫 놀랐다. 방금 전에 백화점에서 크리스마스 분위기 속에 있었던 자신도 오면서 잊어버렸는데, 그녀는 방안에 있으면서도 날짜 감각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녀는 소녀처럼 얼굴에 홍조를 띠고, 미소까지 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뭐 좋은 일 있어?”
옷을 갈아입으면서 재형이 퉁명스레 물어본다.
“아뇨, 좋은 일은 무슨?”
그러면서도 재형은 지선에게서 강력한 감정의 파장이 느껴지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재형이 옷 갈아입는 모습을 보며, 지선은 그가 세파에 많이 찌들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결혼 전의 그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산뜻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물론, 남들이 보기엔 재형은 여전히 깔끔하지만, 지선이 그 옛날 반했던 날카로운 맛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그렇다. 그녀는 누구를 원망할 처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재형의 지친 눈매를 보면, 사막에서 며칠 굶은 하이에나의 눈매를 보는 것 같아 저절로 마음이 우울해졌다. 북극에 사는 늑대처럼 당당했던 남자였는데…….
“자, 그럼, 시작해보자고.”
재형이 어색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가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녀의 몸과 이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소변 팩을 떼어내는 일이다.
소변을 보러가지도 못할 뿐 아니라, 참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의 치마를 걷어 올렸다. 늘 하는 일이지만 부끄러운 마음을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남편이라고 하지만 남자는 남자다.
“아이쿠, 우리 아기, 많이도 쌌네.”
지선은 재형이 오늘은 유난히 잘 대해주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눈에 보일 정도로 이상했다. 괜스레 마음이 불안했다. 술에 취해 폭언하고, 폭력을 행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 있었던 걸까?
“기다려, 씻고 와서 순대 먹자. 순대 사왔어.”
그는 소변 가득한 소변 팩을 들고 문을 열고 나간다.
문이 부드럽게 닫힌다.

재형은 문을 닫으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녀는 아침까지 그가 느끼던 그녀가 아닌 것 같다.
그가 출근한 낮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싱싱한 생선 같은 느낌이 처녀시절의 그녀 같았다. 다치고 난 후부터 그녀에게서 이런 느낌은 처음 받는데…….
새콤한 과일향의 냄새처럼 그런 느낌은 그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소변 팩을 비우고 나서, 물을 받아놓는다. 인생도 이렇게 새롭게 비웠다가, 채웠다가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는 어쩌면 오늘 그와 그녀의 인생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 채워 넣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수를 한다. 차가운 물이 그의 얼굴을 세차게 때린다. 얼얼한 느낌이 든다.
정신이 나라고 찬물로 한 건데, 오히려 정신이 더 없다. 의도와는 다른 일이 이 세상엔 무척 많다고 생각해본다. 수건을 집어 냄새를 맡아본다. 젖 냄새가 난다. 부드럽다.
이 느낌, 지선의 속살 같다.
세숫물을 버리고, 그는 소반을 찾아, 순대를 꺼낸다. 식긴 식었으나, 아직 차지는 않았다.
물도 한 컵 올린다. 문을 열까 하다가, 문 앞에서 잠깐 생각해본다. 쥐약을 어떻게 해야 한다?
문을 열었다. 지선이 자신을 보고 있다.

그가 상을 들고 들어왔다.
지선은 그와 함께 들어온 찬 공기가 무척 반갑게 느껴졌다.
“당신, 순대 좋아하지? 시장에서 소주 한잔 마시다가 당신 생각나서 사왔어.”
재형은 지선의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놓는다. 이럴 때면 지선은 무슨 인형이라도 된 기분이다. 플라스틱 마루인형이 아니라 물에 푹 젖어 흐믈흐믈한 헝겊인형 말이다.
“자, 우선 물부터 먹고…….”
물을 들어 지선에게 먹인다. 시원하게 느껴지는 물맛이 목구멍에 감긴다. 검은 비닐봉지에 싸인 순대는 무슨 거대한 조개라도 된 듯, 재형의 손놀림에도 불구하고,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재형의 두 손이 황새의 부리가 되어 단단한 조개껍질을 찢어버린다.
껍질처럼 검은 조개 속살이 지선의 눈앞에 드러난다. 강한 것은 부러지기 마련이다. 속살을 헤집어 진주를 찾듯이 그는 소금을 찾아 꺼내놓는다. 붉은 소금이 마치 조개의 피 같다.
“자, 아직 식지 않아서 맛있을 거야.”
그는 순대를 하나 찍어서 그녀의 코앞에 가져갔다. 역했다. 무엇이 역한지도 모르게 속이 뒤집혔다. 더러운 느낌의 액체가 올라왔다.
“왜 그래? 속이 안 좋아?”
지선은 입에 잔뜩 머금은 채로 고개를 끄덕인다. 재형은 재빠른 동작으로 휴지를 가져와 지선의 입을 닦아준다. 생각해보면, 사람에게서 나온 것치고 깨끗한 게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대변, 소변, 구토는 물론이고, 욕망, 욕구, 돈, 크게는 범죄, 전쟁 등과 같은 것들 까지…….
“낮에 뭐 잘못 먹었어?”
재형이 상을 찌푸리며 묻는다. 지선은 힘없이 고개를 젓는다. 말을 해야 할까?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 지 난감했다.

그녀는 순대 냄새가 역한 모양이다. 연방 헛구역질을 하고 있다. 착잡했다.
모처럼 그녀에게 잘하려고 순대까지 사왔는데 말이다. 참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 좋아하던 순대인데…….
“여보, 미안해요.”
그녀는 순대를 주섬주섬 소반에 챙겨, 가져 나가려고 하는 재형이 안 되어 보였는지, 핼쑥한 표정으로 말을 한다. 그는 지선을 돌아본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더욱 안 되어 보인다.
그런 그녀를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그는 고개를 돌려 외면한 채 나간다.
문을 닫고, 기대어 선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지선도 지선이지만, 자신을 위해서라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 고개를 저어본다.
들어오면서 아무렇게나 구석에 놓아두었던, 하이힐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재형은 순대가 놓인 소반을 문 앞에 잠시 내려놓고, 하이힐 상자를 들어 조심스럽게 한쪽에 잘 놓는다. “아이고, 일찍 오셨구먼.”
소반을 들고 가다가, 그는 약간 수다스런 목소리를 듣는다.
주인아줌마가 특유의 과장된 손짓을 하며 다가온다.
“순대 좀 드시겠어요?
“새댁이 안 먹지?”
그녀가 순대를 하나 집어 들며 말한다.
“네. 속이 안 좋은지 헛구역질만 하데요.”
“속이 안 좋아서 그런 게 아냐.”
“그럼요?”
재형은 눈을 껌뻑인다. 그녀는 큰 입을 오므려 순대를 우물거리면서, 웃고 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마치 피에로의 얼굴같이 보인다.

지선은 벽에 기대어 앉아있다. 밖에서는 주인아줌마의 호들갑스러운 웃음소리가 방안에까지 퍼져 들어왔다. 아줌마는 자신의 할 말을 대신 해주고 있을 것이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눈치 빠른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차라리 잘되었는지도 몰라……. 지선은 눈을 들어 올려 창밖을 보았다. 해가 다 빠졌는지 어두웠다.
재형은 어떻게 생각할 지 궁금했다. 자신은 이미 결정했지만 말이다.
아이를 보면 희망이 생길 것도 같아……. 희망이 생기면, 몸도 나아지겠지? 나는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거야. 그녀는 눈을 감았다.
이런 기분을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 상쾌하고 포근한 봄날 같은 느낌…….
“여보, 이거 한 번 볼래?”
재형의 잠긴 목소리에 지선은 눈을 떴다. 재형이 상자를 하나 들고 있다.
“뭐예요?”
“으응, 당신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상자 뚜껑을 열자, 빨간 하이힐이 뇌쇄적인 미소를 흘리며 눈에 다가온다.
이 의미는……. 순간적으로 지선은 생각을 해본다.
“그냥, 옛날처럼 다시 이걸 신고 걸었으면 해서…….”
미소를 짓는 재형의 눈이 붉어온다. 가슴이 아프다. 남자를 울게 하는 못된 여자가 된 것 같다.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지만, 그게 미소로 보일런지는 의문이다.
“자, 신겨줄게.”
재형은 상자에서 하이힐을 꺼내, 지선의 힘없는 발에 신겨준다. 떨고 있다.
발에 떨림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어때? 보기 좋아?”
그는 눈동자를 빛내며 그녀를 본다. 눈동자가 젖어 있다.
마치 선생의 칭찬을 기다리는 아이 같다. 그녀는 슬며시 고개를 끄떡여준다.
“곧 아빠가 될 사람이 울기는…….”
“울긴…….”
눈을 소매로 훔치며, 그가 일어선다.
“에이……. 아닌 것 같은데…….”
그녀가 한 번 더 놀려준다. 그는 쑥스러운 듯 어색하게 미소를 짓는다.
그녀는 다시 분위기를 환기 시킬 필요를 느낀다.
“여보, 나도 선물 줄 게 있어요.”
“선물?”
그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오른손 끝을 본다.
그도 손끝을 보자, 그녀는 이를 악물고 힘을 준다. 손가락이 곰지락거리기 시작한다.
“여보…….”
“두고 봐요. 언젠가는 이 하이힐 신고 걸을 수 있을 테니…….”
“여보.......”
그는 목이 아려 와서 말을 못하고,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참고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여보……. 날 용서해줘……. 여보…….
“바보같이……. 울지 말아요. 나까지도 울 것 같잖아요.”
“미안…….”
그는 눈물을 닦고 나서는 쑥스러운 듯 일어나 코트를 뒤져, 약병을 꺼낸다.
“뭐예요?”
“으응……. 쥐약이야. 요즘엔 과립으로 되어 있대.”
그는 태연하게 뚜껑을 열면서 말을 한다.
“부엌에 쥐가 많은 것 같아서…….”
그는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문을 열고 나간다.
밤바람이 방안을 휘젓는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창밖을 바라본다.
밤하늘에 별들이 쥐약을 흩뿌려놓은 듯 빛난다.


<끝>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