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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13 16:38

자유인

조회 수 2983 댓글 0
자유인 (自由人)

나는 지난 5월 5일에 웨딩마취를 올렸다. 결혼을 한 것이다.
한 번의 아픔을 겪은 후에 다시 올리는 결혼이었기에 그 날의 웨딩마취는 내 인생의 크나큰 의미였고, 그 날 그 자리에 참석해준 하객들은 한 사람 한 사람 고맙기 그지없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살아온 과정을 아는 사람들이기에 다시 시작하는 인생을 아낌없이 축복해주고
이제는 아픔 없이 정말 잘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하객들 중에는 내가 미처 연락하지 못했는데도 소식을 알고 축하해주러 온 사람
들이 있었고 그 중에 한 사람이 정식 오빠였다. 결혼식장에서 그 오빠의 우렁찬 목소리를
듣는 순간. 참 기쁘고 고마웠다.
내가 오빠를 처음 본 것은 94년 6월 상록수 백일장에서였다.
처음 봤을 때, 오빠의 그 익살스런 모습과 우렁찬 목소리에 강한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
다. 그리고 오빠는 나의 새로운 출발과 그로인한 아픔 등을 아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내가 연락을 못했음에도 오빠가 축하해주러 왔을 때에는 내가 정말 잘기를 바라는
오빠의 진심어린 그 마음이 담겨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날 결혼식장에서 오빠의 그 우렁찬
목소리를 들었을 때, 오빠의 그러한 마음이 말하지 않아도 전해져 와서 긴장된 가운데서도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그런데 그랬던 오빠가 얼마 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다니.......
정말 지금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오빠가 간암 선고를 받고 시한부 생명이라는 얘기를 들었
을 때도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오빠를 만나보러 가기로 했었다. 그런데 내가 오빠를 만나
보러 가기위해 날까지 잡아놓은 상태에서 그만 오빠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말았
다. 아무리 오빠가 시한부 삶이라 했어도 그렇게 빨리 가리라고는 상상을 못했었다.
아니, 그러나 오빠의 부음을 접하기 며칠 전부터는 왠지 오빠를 빨리 만나러 가야겠다는 생
각이 들었다. 자꾸 마음이 급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만나러 갈때까지는 설마, 그
때까지야 설마 했었는데....... 아무리 거리가 멀어도 좀 더 빨리 오빠를 만나보러 갔어야 했
는데, 다른 시간 다 미루더라도 오빠를 만나러 갔어야 했는데....... 참으로 후회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오빠는 대체 뭐가 그리고 급해서 내가 만나보러 가기도 전에 가야했을까?
야속한 오빠....... 내 결혼식에 달려와 준 것이 너무 고마워서 오빠가 결혼하게 되면 몇 배
로 축하해 주리라 마음먹고 있었는데, 내가 갚아줄 기회도 안 주고 가버리다니 의리 없는
사람 같으니라구....... 부음을 접하고 남편과 함께 오빠가 있는 영안실로 찾아갔다. 그리고
나는 조의금을 꺼냈다. 내가 오빠 앞에 조의금을 내게 될 줄이야.......
오빠는 내게 축의금을 줬으면서 나한테는 조의금을 내게 하다니, 이 아저씨 정말 여러 가지로 미워서 견딜 수가 없다. 본인은 그 어려운 경제 사정 속에서도 내게 축의금을 줬으면서 그럼 내게도 축의금으로 받을 것이지, 이 때려주고 싶은 오빠야!! 이렇게 사람 미안하게 만들어도 되는 거니?
간이 그 지경이 되도록 병원도 못가고 지내야 했던 오빠의 안타까운 사정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래, 고단한 삶을 벗고 하늘나라의 행복을 빨리 느끼라고 하나님이 그렇게 빨리 데려가신 거겠지. ‘이 무정한 사람아, 남아 있는 사람들 황당하게 하고 간만큼 하늘나라에서 행복해야 해!’
이제야 비로소 몸과 마음의 짐을 벗고 날개를 달고 훨훨 날고 있을 익살스럽고 우렁찬 정식 오빠, 영원한 자유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모두가 당신을 정말 많이 사랑함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영원한 자유인이 된 정식 오빠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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